본문 바로가기

공부의흔적

내가 만난 미등록 이민의 얼굴

지난 11월21일 뉴욕 시민들이 오바마의 이민개혁 조치를 환영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의 일이다. 교육대학원에서 개설한 '미국의 이민과 교육'이라는 수업에서 미등록 이민자 출신 학생들이 겪는 교육권의 제약에 대해 논의하던 중이었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까지는 대체로 체류 자격에 구애받지 않고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대학 진학 시에는 사정이 다르다. 비싼 대학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장학금이나 학자금 대출이 필수적인데, 미등록 신분 탓에 지원 과정에서부터 장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몇몇 주를 제외하면, 미등록 이민자 학생들은 주립대학들이 해당 주 출신의 입학생에게 적용하는 등록금(in-state tuition)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보니 막대한 등록금 부담을 우려해 애초부터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한 해 전 다른 수업에서 기말페이퍼를 준비하면서 이미 알게 된 내용이었기에, 감흥없이 교수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뒤,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4-50명 정도 모인 강의실의 한쪽 귀퉁이앉아있던 여학생 한 명손을 들고 말했"사실 저는 미등록 (이민자) 이었어(I was an undocumented, too.)" 라고.

 

히스패닉계인 그는 자신이 '페이퍼'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받은 충격과 절망을그럼에도 자신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준 고교 은사와 대학 당국에 대한 감사를 이야기했다. 그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명문 대학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반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대다수의 미등록 이민자 학생들이 자신과 같은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데에 대해서 늘 미안함과 부채의식을 느낀다고도 털어놨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더 이상 신분의 불안을 염려하지 않고 교육을 받게 되었지만(미성년의 미등록 이민자 중 일부는 합법적 체류권을 얻기도 한다), 사실은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한다고 고백한 직후였다. 모두들 그의 흐느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당차고 씩씩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깊은 정적이 강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이어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는, 공감과 위로, 응원과 연대가 한 데 어우러진 박수였다. 그러더니 다른 누군가가 손을 들고 비슷한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실은 나도 미등록입니다"라고. 처음 말문을 꺼낸 여학생의 뒤를 이어 한 명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50명도 채 되지 는 강의실에서 미등록 신분을 스스로 밝힌 이들의 숫자였다. 소수 인종 출신인 담당 교수를 비롯해 대다수 수강생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이 상황을 보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4년도 지난 일이지만, 당시 강의실을 가득 채운 공기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처음으로 책에서가 아닌, 바로 옆서 미국의 미등록 이민자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미등록 이민'이라는 사회과학적인 용어가, 실은 수많은 얼굴들로 이루어져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지난달 오바마 대통령의 이민 관련 연설을 보면서 다시금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오바마가 발표한 이민 관련 행정명령의 최대 쟁점은, 바로 미등록 이민자를 둘러싼 처우이기 때문이다. 이번 행정명령에는 미등록 이민자의 강제추방을 유예하는 조치가 담겼다. 당장 합법적인 체류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당 요건을 충족하는 미등록 이민자들에게는 3년간 유효한 취업허가가 발급된다. 오바마의 말처럼 "그림자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는 셈이다. 1100만여명에 달하는 미국내 미등록 이민자의 약 절반 가량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당연히 공화당과 보수 진영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오바마의 조치가 불법 행위에 대한 사면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특히 행정명령 발표를 두고 "권력의 남용" "전제군주적 행태" 등과 같은 원색적 비난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진보 진영은 과거 공화당 정권 하에서도 수차례 미등록 이민자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 조치가 이뤄졌다고 맞서고 있다. 오바마는 연설에서 대규모 강제추방이란 비현실적이며, 미국의 정신에도 부합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는 특히 대통령 행정명령의 불가피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사태의 근본적인 임은, 1년 넘게 법안을 처리하지 않은 공화당에 있다는 것이다.  

 

오바마가 취임 초기부터 우선 과제로 언급해 온 이민 개혁 이슈는 이제 뜨거운 정치 공방의 대상이 되었다. 중간선거로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과 행정부의 팽팽한 힘겨루기가 예상된다. 미등록 이민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히스패닉계 표심을 감안할 때, 양측의 눈치작전도 치열하게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치권에서 논쟁이 본격화될수록 이민 이슈 - 미등록 이민도 포함하여 - 의 핵심에는 결국 사람과 삶이 놓여있다는 본질이 뒤로 밀려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유학생인 내가 우연히 강의실에서 "나도 미등록이야"라는 외침에 맞닥뜨린 것처럼, 많은 미국인들도 일상에서 숱하게 미등록 이민의 풍경들을 마주할 것이다. 멀리서나마 공방을 지켜볼 뿐이지만, 적어도 미국 사회와 정치권이 미등록 이민이 수많은 얼굴들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아마도 이번 이민개혁 공방이 미등록 이민자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