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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흔적

필리핀과 한국

우연히 지하철역 승강장을 지나다가 본 전광판 광고이다. 

휴양지로, 신혼여행지로, 저렴한 어학연수지로 각광받는 필리핀. 대한민국과 아주 가까이에 있다.   



앞서 필리핀 태풍에 대해 올린 포스팅에 추가로 덧붙이고 싶은 내용이 있다. 바로 초대형 태풍으로 충격에 빠진 필리핀 소식을 접하면서 유독 내 마음이 쓰이는 또 하나의 이유에 대해서다. 필리핀,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옛 기억의 조각들과 더불어, '지금 여기'에도 밀접하게 얽혀있는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현재 우리 단체와 협력 관계에 있는 지역사회 복지기관들을 들 수 있다. 즉, 이주여성이나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위한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다문화센터나 지역아동센터들이다. 이곳에서 필리핀 출신의 여성들이나 필리핀계 한국인 자녀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필리핀 타클로반 지역에 태풍이 휩쓸고 간 이후 출근하자마자 직원에게 센터의 피해 실태를 파악해볼 것을 주문했다. 센터에서도 태풍 소식에 적잖이 당황한 분위기였다. 센터를 이용하는 필리핀 여성들이 제법 있는데, 아직까지는 정확한 실태를 모른다고 했다. 우리의 전화를 받은 즈음에 막 피해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곳도 더러 있었다. 


몇 시간쯤후부터 센터에서 문자가 왔다. "피해 지역에 가족이 살고 있는데 연락이 두절됐다"는 필리핀 이주여성의 안타까운 사연, "옷과 식량이 필요한데 어떻게 지원해줄 수 없겠냐"는 절박한 요청 등등이 있었다. 사실 협력기관의 피해 상황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만 해도, 어떻게 도와야 할 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이 서 있지 않은 상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염려가 반, 호기심이 반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센터 식구들의 안타까운 상황에 유감을 표하고, 센터에서 지원 계획이 있다면 동참을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구호단체를 통해서 개별적으로 모금할 것을 권장하는 선에서 그쳤다. 모금이나 국제구호에 아무런 전문성도 없는 단체에서 섣불리 나섰다가 오히려 신뢰를 잃을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물론 하루하루 돌아가는 일들이 너무 많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서 다시 한번, 필리핀 태풍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단지 특정 지역에서 국지적으로 발생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전지구적인 범위에서 영향을 끼치는 공동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국에 사는 필리핀인이 태풍으로 고향이 파괴되고 또 가족들까지도 잃었다면, 그것이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과 전혀 무관하게 취급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 필리핀인이 이주노동자라면 어떻게든 더 많은 돈을 벌어서 송금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지도 모르고, 결혼이민자라면 심한 상실감과 우울감에 시달릴 것이다. 유학생이라면 당장이라도 본국에 돌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필리핀의 문제는 한국과도 연결되어 있다. 필리핀이 겪는 현실이 곧 한국 사회의 현실, 그러니까 '우리'의 문제이다. 


뉴스를 검색해보니 필리핀 태풍을 '다문화' 사회로 이동하고 있는 한국의 맥락에 연결시킨 기사가 몇 개 보였다. "지역내 필리핀계 이주민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성금 얼마얼마를 전달했다"는 식이다. 물론 이주민이라고 하면 대개는 한국 정상가족화의 범주 안에서 이야기되는 결혼이민자가 거론된다. 미등록 신분일 수도 있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경향신문에서 미국내 필리핀계 인구의 동향에 관해 보도한 것이 눈에 띄었다. 기사는 세계 최대의 이주노동 송출국인 필리핀 디아스포라의 안타까운 심경을 전했다. 참 반갑고, 또 괜히 고마운 시각이자 감수성이었다. 한 지역의 문제가 다른 지역, 그리고 세계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느꼈다. 특히나 필리핀 디아스포라는 송금remittance을 무기로 자국 경제를 좌우할 뿐 아니라, 필리핀 정치, 시민사회계에도 위력적인 힘을 가진다.  



우리나라에도 필리핀 디아스포라가 존재한다. 최초의 '다문화' 국회의원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필리핀계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 덕분에, 가시적으로도 필리핀 디아스포라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그 이자스민 의원이 필리핀 태풍 지원과 관련하여 국회에 결의안을 제안했다고 한다. 결의안이라는 것이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선택지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후로 하더라도, 상징적인 의미는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에 관해 '네티즌'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한국에서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는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주의, xenophobia)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군과 국가 정보기관이 온라인 댓글과 트위터 등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여론 조작을 시도한 것이 드러난 판국에, 과연 '네티즌'이라는 집단을 유의미하게, 독립적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