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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가도사람생각

교향악 듣는 일상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연주 시리즈 '아르스 노바'. 현대음악 소개를 맡은 상임작곡가 진은숙(가운데)과 예술감독 정명훈이 나란히 있다.


그제와 어제, 그러니까 평일 저녁에 이틀 연속으로 교향악을 들으러 갔다. 매년 이맘때면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교향악 축제'와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연주회인 '아르스 노바 시리즈'를 차례로 감상했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편이지만, 일부러 음악당까지 찾아가서 듣는 일은 거의 없다. 더욱이 주중에는 저녁 약속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해 축 늘어져있거나 아니면 퇴근 시간이 지나서도 사무실에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모처럼 동선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칼퇴근 후 공연장으로 향한 것이다. 


교향악 축제는 순전히 레퍼토리 때문에 선택했다. 생상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더불어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이 연주 목록에 올라 있었다. 사실 연주를 맡은 국내 교향악단의 명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도 기왕 음악당까지 가서 교향악을 듣기로 했으니 말러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관현악과 타악을 망라하여 웬만한 악기들이 총출동하는 말러 특유의 웅장한 스케일을 경험하고 싶었다. 누가, 어떻게 말러를 연주하는지는 다음 문제였다. 어차피 나는 교향악단 별로 연주실력을 세밀하게 평가하고 분석하는 심미안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다행히 3층 꼭대기 맨 앞줄 좌석이 남아있었다. 가장 저렴한 티켓으로 구입했다. 


서울시향의 아르스 노바 시리즈 II '관현악 콘서트: 명상 & 신비'는 반대의 이유로 선택했다. 레퍼토리보다는 인물이 중요했다. 10년 동안 이어져온 이 시리즈의 지휘를 맡은 이는 다름 아닌 정명훈. 과거 몇 차례 그가 이끄는 서울시향 연주회를 본 적이 있었는데, 다시 한번 그의 명성을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최근 그의 거취나 언행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게 불거지고 있지만, 정명훈이 서울시향의 음악적 수준을 한 단계 성숙시켰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사실 프랑스 현대음악가들의 곡으로 구성된 레퍼토리는 내게 생소했다. 난해함을 넘어서 불편함까지 안겨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정명훈이라는 이름 석자만으로도 음악회 나들이를 결심하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고맙게도 내게 공연표를 선뜻 내어준 한 선배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관람 자체가 불가능했겠지만. 


'레퍼토리 vs 인물'의 구도에서의 승자는 후자였다. 인물을 선택한 결과, 놀랍게도 레퍼토리까지 덩달아 마음에 와 닿는 경험을 했다. 이날 서울시향은 리 뒤티외(Henri Dutilleux), 파스칼 뒤사팽(Pascal Dusapin), 그리고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의 곡을 연주했다.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는 이들이지만, 현대음악에 극도로 무지하고 무관심한 내게는 그저 낯선 음악이었다. 아마도 정명훈과 초대권에 '혹해서' 연주회에 오지 않았더라면 영영 접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 내가, 끝까지 앉아서 이들의 음악을 들었을 뿐 아니라 어느 순간에는 빠져드는 듯한 경험을 했다. 바이올린 협연이 포함된 뒤사팽의 곡은 '상승'이라는 제목에 부합이라도 하듯, 현악기의 날카롭고 아슬아슬한 고음이 연신 이어졌다. 그런데 뭔가가 거슬린다는 생각이 떠오를 찰나, 정명훈의 지휘와 존재감을 보면서 외려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10년 가까이 서울시향 예술감독으로 재직해 온 정명훈에게는 연륜이 묻어나왔다. 힘들이지 않고 슥삭 슥삭 연주를 이끌어간다는 느낌을 주었다. 거장의 카리스마보다는, 오래도록 해 온 일에 한결같이 몰두하는 장인의 면모에 가까웠다고 할까. 정명훈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평소 지휘 스타일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이끄는 교향악단과 함께 청중에게 낯선 음악을 소개하는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보였던지 현대음악에 대해 갖고 있던 거리감을 잊게 만들었다. 막연한 거리감이 사라지니, 현대음악 특유의 음의 대립과 부조화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음악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내 귀를 더 크게 열어야 했다. 그렇게 정명훈의 명성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현대음악의 매력에도 아주 조금은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음악으로) 귀가 호강하면 몸의 감각이 달라진다"고 한 선배는 말했다. 나 역시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틀 동안 교향악단의 연주를 듣기 위해 공연장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또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퇴근 후에 종종 교향악을 듣는 일상을 누릴 수 있다면, 제법 괜찮은 인생이 될 것이라고.


음악당도 좋지만 언젠가는 야외에서 교향악을 듣고 싶다. 사진은 탱글우드(Tanglewood) 음악축제의 한 장면. 출처는 보스턴심포니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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