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디가도사람생각

실내악의 관능

영국 화가 John Copley의


'실내악' 하면 흔히 떠오르는 풍경 몇 가지가 있다. 근대 유럽의 고풍스러운 저택에서 한껏 차려입은 귀족들이 우아하게 만찬을 즐긴다. 한쪽 구석에서 정장 차림의 음악가들이 실내악을 연주한다. 경쾌하면서도 경박하지는 않은 연주음악이 흘러나오는 연회장에서 귀족들은 사교에 열중한다. 당대의 한국으로 넘어오면,  결혼식 반주로 각광받는 실내악을 만난다. 예식 순서에 따라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로 구성된 '피아노트리오'가 반주를 맡는 일이 서양식 예식에서는 하나의 불문율이 되었다. 


수세기 동안 실내악 혹은 체임버 뮤직은 하나의 독립된 음악장르로써 굳건한 입지를 다져왔다. 유명 작곡가들에 의해 탄생한 빼어난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널리 연주되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실내악은 '기능적' 측면에서 더 주목받는다는 느낌이다. 귀빈들이 참석하는 만찬장이라면 우아한 분위기를, 결혼식장이라면 따스하면서도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 즉, 특정한 공간적 맥락에 부합하는 '배경음악'의 기능을 얼마나 잘 수행했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음악 자체보다도 음악의 쓰임새가 중시되다보면, 자연히 연주자와 청중 사이의 교감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실내악을 전면에 내세운 음악회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특히 지난 4 27일부터 5월 9일까지 열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사진 아래)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실내악 전문 음악축제이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이 축제에 친구의 초대로 두 번의 연주회에 참석했다. 축제는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예술의전당 IBK홀 등 비교적 소규모의 공연장에서 나뉘어 진행됐다. 연주 레퍼토리에는 짤막한 소품 여러 곡과 함께 브람스, 베토벤, 아렌스키 등 널리 알려진 작곡가의 삼중주나 사중주 곡이 포함됐다. 


한 회의 연주회에 등장하는 악기의 수는 많아야 5-6개였다. 현악 사중주, 관악기, 그리고 피아노. 교향악에 비하면 지극히 단출하고도 소박한 악기 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실내악의 '사운드'는 연주회장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단지 공연장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실내악 무대에서는 평소 오케스트라의 합주 속에 묻혀있던 악기들이 저마다의 음색과 기량을 드러냈다. 각자가 맡은 파트에서 하나된 소리를 내는 데에 주로 집중해 온 바이올린이나 비올라 주자도 이날은 홀로 개성을 뽐냈다. 그러면서도 이내 다른 악기들과 조화를 이루어 환상의 화음을 선보였다. 악기 하나하나의 고유성이 극대화되면서 소리의 밀도가 더해졌다. 


실내악 사운드에서 포만감을 느꼈다면, '비주얼'로는 또 다른 종류의 충족감을 느꼈다. 교향악과는 달리 소수의 악기를 눈으로 따라가는 과정에서, 악기와 연주자의 '혼연일체'를 느꼈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비단 클래식이 아니더라도 악기 연주에 몰입해있는 연주자의 몸에서는 남다른 에너지가 뿜어져나오기 마련이다. 연주자는 대체로 악기를 지배하지만, 때로는 온전히 종속된다. 지배와 종속 사이의 끝없는 긴장 속에서 연주자는 악기를 길들이며 자신의 몸을 악기와 일치시킨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노년에 접어든 어느 첼리스트의 경우가 딱 그러했다. 멀리서도 얼굴 주름이 보이는 이 베테랑 연주자는 곡이 시작되자 곧 악기와 하나가 되었다. 그와 악기가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많은 무대에서 함께 부대끼며 단련되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첼리스트는 때때로 깊은 숨을 내쉬며 연주를 가다듬었고, 그때마다 그의 첼로도 가볍게 흔들리면서 제 자리를 찾았다. 특히 그가 첼로를 전신으로 부둥켜안고 연주하는 모습이 사랑하는 여인을 애무하는 몸짓과도 흡사해보였다. 황혼기를 지난 첼리스트와 첼로의 선율이, 아니 실내악이 이토록 관능적일 수 있다니. 실내악에서만 얻을 수 있는 시각적인 발견이었다. 


첼리스트 조영창이 그 주인공이다.

'더디가도사람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화장'을 보고  (0) 2015.04.21
교향악 듣는 일상  (2) 2015.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