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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장과 이동 - 영화 '보이후드'

극적인 플롯이나 특출난 촬영기법,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는 컴퓨터그래픽 하나 없다. 하지만 지금껏 나온 어떤 영화보다도 새롭다. 한 편의 영화 안에서 배우들은 실제로 나이를 먹어가고, 관객은 그들과 함께 영화 한 편의 런닝타임을 넘어서는 시간의 흐름을 경험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신작 '보이후드'는 어쩌면 영화 그리고 영화를 보는 경험에 관한 가장 최신의, 급진적인 해석인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영화 '보이후드'는 12년간 같은 배우들과 작업한 결과물이다. 1년에 15분씩의 분량을 촬영, 총 165분 동안 12년을 담아냈다. 그 사이 여섯살 소년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은 열여덟살의 청년으로 자라난다. 영화는 소년이 커 가는 과정을 충실히 담는다. 


아이에게 12년은 매우 긴 시간이다. 엄마의 품 안을 벗어날 줄 모르는 귀여운 코흘리개였던 메이슨은 1,2차 성징을 겪고, 술과 여자에 눈 뜨는 한편, 삶을 걸고 몰두히고픈 대상(메이슨에게는 카메라와 사진찍기다)을 발견하며, 마침내 가족을 떠나 자신만의 길을 찾아간다. 아이의 키나 몸무게가 매년 훌쩍 점프해가는 것처럼, 아이의 성장은 급격한 변화를 의미한다. 어린시절의 기억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것도, 문득 돌아보면 그랬었나 싶은 순간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12년 동안 소년의 곁을 지키는 가족들도 조금씩 성장한다. 두세살 위의 누나 사만다, 싱글맘으로 남매를 키우는 엄마(패트리샤 아퀘트), 그리고 이혼한 아빠(에단 호크).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가족이지만, 어느 가족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들을 겪기 때문에 낯설지 않다. 다분히 미국적인 가족의 삶을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감을 자아내는 대목이 적지 않다. 가족 안에 흐르는 정서, 혹은 가족 간의 갈등이란 것이 어느 정도 보편성을 띠는 탓은 아닐까. 


나는 유독 메이슨이 경험하는 '이동'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영화를 보았다. 소년 메이슨은 두 자녀를 홀로 키워야 하는 엄마의 공부와 일, 재혼 등의 이유로 여러 차례 이사를 한다. 그 때마다 정든 집과 학교, 친구들을 떠나고, 새로운 공간에 적응해야 한다. 메이슨과는 다른 이유였지만 나 역시 유년시절에 여러 차례의 이동을 경험했다. 그것도 국경을 넘나드는. 때문에 반복되는 이사와 전학을 겪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안다.  


이사와 전학 속에서 아이가 느끼는 감정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영화 속에서도 아이들이 종종 대사로 내뱉는 'awkward'라는 단어일 것 같다. 대략 어색하고, 서투르고, 어중간하고, 그래서 약간 민망하기까지 한 정서를 담은 단어이다. 대도시 휴스턴으로 이사한 후 처음 간 학교에서 메이슨의 표정이 딱 그랬다. 전학 온 아이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주위 눈치를 살피는, 정말 awkward한 상황을 잘 표현했다. 오래 전 내가 외국에서 한국의 초등학교로 처음 전학왔을 때의 상황이 불현듯 떠오를 정도로.


사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집과 친구들을 떠나서, 어느날 갑자기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틈 사이에 놓이는 것 자체도 awkward한 일이다. 그 속에서 나를 처음부터 소개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awkward하다. 하지만 자라면서 조금씩 그렇지 않은 체 연기하는 법도 터득하게 된다. 메이슨도 몇 번의 이사와 전학에 점차 의연하게 대처한다. 어쩌면 성장한다는 것은 그처럼 awkward라는 느낌을 깨우치고, 극복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누나 사만다의 집에 놀러 온 친구는 사만다가 엄마에게 혼쭐이 나는 모습을 목격하지만, 정작 그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군다. 나중에 너무 "awkward했다"고 고백할 뿐이다. 대학에 입학한 메이슨은 새로 만난 여자친구(아래 사진)와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다가, 여섯 살 아이들은 "아직 awkward라는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자기 자신을 스스럼없이 표현한다고 말한다. 



청년이 된 메이슨은 대학 입학과 함께 스스로 선택한 '이동'을 경험한다. 이제 이 상황에 적응해야 하는 쪽은 메이슨이 아니라 그의 부모이다. 매사 당당했던 엄마는 결국 아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의 바람과 달리, 생애 첫 사진작품을 챙겨가지 않겠다는 메이슨의 말에 엄마는 참았던 감정이 무너져 내린다. 아빠는 연애에 관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예전에 밴드를 함께 한 친구에게 메이슨을 위한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그동안도, 앞으로도 메이슨을 곁에서 지켜보지는 못하겠지만 친구로 남겠다는 약속이나 다름없다. 나 또한 유학과 결혼 등 내가 선택한 '이동'을 할 때마다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씩씩하지만 마음 약한 우리 엄마가 눈물을 삼키는 모습을 등 뒤에서 느끼고도 차마 뒤돌아보진 못했다. 과묵하지만 속정 깊은 아빠가 말 없이 건네는 눈빛을 애써 모른 체 했다. 


메이슨이 대학에 가면서 12년의 대장정도 끝에 다다른다. 관객으로서는 정든 캐릭터들, 배우들과 이별해야 하는 시간이다. 아마도 영화사상 처음이었을 실험적인 프로젝트도 막을 내린다. 12년 동안 배우들의 외모는 세월을 비켜가지 못한다. 하지만 누구 한 명 크게 다치거나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레오 까락스와 드니 라방처럼,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분신이자 영화적 동료가 된 에단 호크는 특히나 반갑다.


'보이후드'는 오랜만에 만난 새롭고 신선한 영화이다. 언젠가 '영화가 다 그렇고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 때면 이런 영화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1년을 똑같이 15분씩으로 표현했다는 점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같은 시간이라고 해서 우리에게 동일한 의미로 남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느낄 정도로 행복한 순간도 있지만, 속히 흘러가버렸으면 하는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다. 그렇다면 매 해를 15분에 담는다는 원칙은 때에 따라서는 몹시 잔인한 처사이다. 


만약 메이슨이 혹은 주인공들 스스로가 영원하기를 갈망했을 순간들에 돋보기를 들이댔다면, 어떨까. 링클레이터 자신은 18년에 걸쳐 '비포' 시리즈를 촬영한 후에는 더 이상 연작 영화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보이후드' 속편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