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실내악의 관능 '실내악' 하면 흔히 떠오르는 풍경 몇 가지가 있다. 근대 유럽의 고풍스러운 저택에서 한껏 차려입은 귀족들이 우아하게 만찬을 즐긴다. 한쪽 구석에서 정장 차림의 음악가들이 실내악을 연주한다. 경쾌하면서도 경박하지는 않은 연주음악이 흘러나오는 연회장에서 귀족들은 사교에 열중한다. 당대의 한국으로 넘어오면, 결혼식 반주로 각광받는 실내악을 만난다. 예식 순서에 따라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로 구성된 '피아노트리오'가 반주를 맡는 일이 서양식 예식에서는 하나의 불문율이 되었다. 수세기 동안 실내악 혹은 체임버 뮤직은 하나의 독립된 음악장르로써 굳건한 입지를 다져왔다. 유명 작곡가들에 의해 탄생한 빼어난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널리 연주되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실내악은 '기능적' 측.. 더보기
유럽의 이주자 위기와 야만 '유럽의 이주자 위기(Europe's migrant crisis)'. 지난 한 주 주요 외신들의 홈페이지 한 구석을 장식한 문구이다. 최근 지중해에서 난민들을 태우고 유럽으로 향하던 선박의 전복 사고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유럽의 대응 능력과 이주자 대책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지난 18일 리비아에서 출발한 어선이 이탈리아 인근 지중해에서 전복하면서 800여명이 숨졌다. 이 사고에서 구조된 난민은 900명이 넘는 탑승자 중 28명에 불과했다. 이어 20일에도 터키에서 출발한 난민선이 그리스 남동부 로도스 섬 근처에서 좌초돼 탑승자 300명중 최소 2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중해의 비극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해마다 수많은 이주자들이 뗏목, 작은 고기잡이배, .. 더보기
영화 '화장'을 보고 (스포일러 일부 포함) 임권택 감독의 신작 '화장'을 봤다. 감독이 102번째로 만든 이 영화는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암 투병 중인 아내를 둔 중년의 남자 주인공이 다른 여자에게 연정을 품는다는 이야기이다. 화장품 기업 임원인 오상무(안성기 분)는 밤마다 아내가 입원한 병실을 지키며 아내를 보살핀다. 그런데 사실 그의 마음은 딴 데 가 있다. 젊고 아름다운, 부하 여직원에게 홀딱 빠진 것이다. 오상무의 욕망은 처음에는 슬그머니 그 여직원을 훔쳐보는 것 정도로 나타난다. 그러다가 결국엔 아내와의 결정적 순간에서도 그녀를 상상하기에 이른다. 남편의 욕망이 충돌하는 대상은 아내의 목숨이다. 비록 그의 욕망이 실제 사건이나 행위로 발전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는 아내 옆에서 남.. 더보기
교향악 듣는 일상 그제와 어제, 그러니까 평일 저녁에 이틀 연속으로 교향악을 들으러 갔다. 매년 이맘때면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교향악 축제'와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연주회인 '아르스 노바 시리즈'를 차례로 감상했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편이지만, 일부러 음악당까지 찾아가서 듣는 일은 거의 없다. 더욱이 주중에는 저녁 약속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해 축 늘어져있거나 아니면 퇴근 시간이 지나서도 사무실에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모처럼 동선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칼퇴근 후 공연장으로 향한 것이다. 교향악 축제는 순전히 레퍼토리 때문에 선택했다. 생상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더불어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이 연주 목록에 올라 있었다. 사실 연주를 맡은 국내 교향악단.. 더보기
청년 일자리 문제, 통계와 현실 최근 청년 일자리에 대한 통계자료가 잇따라 발표되었다. 통계청의 '2015. 2. 고용동향'에 따르면 청년층(15-29세)의 실업률은 11.5%에 달한다. IMF 경제위기 직후 이후에 실시했던 조사를 제외하고는 최고치라고 한다. 높은 실업률을 뒷받침하듯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청년들도 줄어들고 있다. 아래 그래프와 같이, 20대 청년층의 고용률은 57.2%에 그치고 청년 취업자 숫자가 점차 감소하는 추세이다. 어렵게 취업을 했다 해도 상황은 좋지 않다. 신규 청년 취업자 5명중 1명은 계약직으로 출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당시 첫 일자리가 1년 이하 계약직인 취업자는 11%였으나, 2011년부터 20%대로 진입했다. (2015. 1.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청년층 부가조사) 통계가 말해주는 청년 .. 더보기
예기치 못한 공감 어떤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면 적절한 수준의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그와 더불어, 말이나 글, 즉 언어로써 현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포스팅에서 일터에서 느끼는 고민들을 종종 객관화하여 들여다보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하지만 막상 언어화하려니 조금 막막했다. 특수한 맥락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들다는 생각에 계속 주저했던 탓일까. 그러던 중 최근 어떤 만남을 통해 계기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낯선 이와의 짧은 업무 관련 미팅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내게는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하나의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영어 표현으로 흔히 'total stranger'라고 하는) 생판 남이나 마찬가지인 이에게서 '예기치 못한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더보기
동료는 돈보다 소중한가 -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벨기에 출신 영화감독 다르덴 형제의 신작 '내일을 위한 시간'(위 사진). 몇 달 전, 다소 지친 표정의 마리옹 꼬띠아르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포스터 이미지를 보았을 때부터 관람을 벼르던 영화다. 포스터나 제목 만으로는 어떤 영화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영화는 굵직한 질문 몇 개를 던진다. 그 중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명료하면서도 중심이 되는 질문은, 이 글의 제목으로 달기도 한 '동료는 돈보다 소중한가'이다. 좀더 풀어서 써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될 것이다. 회사는 (또는 공동체는) '아픈' 해고노동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큰 액수의 돈이 걸려있다면, 그럼에도 해고된 동료와 함께 할 수 있는가. 대부분이 돈을 택한다면, 그것은 문제인가. 만약 내가 당사자인 그 해고노동자라면, .. 더보기
내가 만난 미등록 이민의 얼굴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의 일이다. 교육대학원에서 개설한 '미국의 이민과 교육'이라는 수업에서 미등록 이민자 출신 학생들이 겪는 교육권의 제약에 대해 논의하던 중이었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까지는 대체로 체류 자격에 구애받지 않고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대학 진학 시에는 사정이 다르다. 비싼 대학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장학금이나 학자금 대출이 필수적인데, 미등록 신분 탓에 지원 과정에서부터 장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몇몇 주를 제외하면, 미등록 이민자 학생들은 주립대학들이 해당 주 출신의 입학생에게 적용하는 등록금(in-state tuition)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보니 막대한 등록금 부담을 우려해 애초부터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한 해 전 다른 수업에서 기말페이퍼를.. 더보기
교육의 형평성이라는 개념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일은 아니지만, 비영리 교육 사업을 진행하는 일 역시 넓게 보면 '교육' 활동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기자를 그만두고 실무의 영역에 뛰어든 후부터 지금까지 여러 개의 교육 관련 프로젝트들을 담당하고 있는 나도 교육 분야에 몸담고 있는 셈이다. 햇수로 벌써 4년째이다. 하지만 아직은 교육에 대한 나 스스로의 고민이 깊어졌다고 말하기는 힘든 것 같다. 생각할 틈 없이 그날그날 부딪히는 일들을 해결하는 데 급급해서일까. 그래서 교육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장에 가는 일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활동을 눈으로 보면 그 의미에 대해서도 조금 더 진지하게 탐색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시각을 접하기도 한다. 그동안 주로 찾.. 더보기
어떤 성장과 이동 - 영화 '보이후드' 극적인 플롯이나 특출난 촬영기법,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는 컴퓨터그래픽 하나 없다. 하지만 지금껏 나온 어떤 영화보다도 새롭다. 한 편의 영화 안에서 배우들은 실제로 나이를 먹어가고, 관객은 그들과 함께 영화 한 편의 런닝타임을 넘어서는 시간의 흐름을 경험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신작 '보이후드'는 어쩌면 영화 그리고 영화를 보는 경험에 관한 가장 최신의, 급진적인 해석인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영화 '보이후드'는 12년간 같은 배우들과 작업한 결과물이다. 1년에 15분씩의 분량을 촬영, 총 165분 동안 12년을 담아냈다. 그 사이 여섯살 소년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은 열여덟살의 청년으로 자라난다. 영화는 소년이 커 가는 과정을 충실히 담는다. 아이에게 12년은 매우 긴 시간이다.. 더보기